- [팬픽] 얼음성 1부 ~ 삽화 by 유기농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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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7 19:29:54
Cyphers Fanfiction Project, 얼음성
비가 내린다. 아침부터 흐렸던 날씨가 정오가 지날 무렵부터는 마구 꾸르릉대는 소리를 내며 비를 퍼붓는다. 비가 오는 것이야 런던에서는 일상 같은 일이었지만, 아침에는 맑았던 날씨가 삽시간에 밤처럼 어두워지고, 빗소리에 가려 돌바닥을 지나는 짐마차의 따각거리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의 비는 낙엽 질 무렵의 가을에 확실히 흔한 일은 아니었다.
가게 안에 있던, 수염과 머리가 희끄무레한 서점 주인은 가게 안을 비추고 있는 랜턴의 기름을 갈아 넣은 후 한 손으로 안경을 살짝 올려 조용히 손목시계를 바라본다. 두 시 이십 분인지 네 시 십 분인지 그의 눈으로는 통 분간이 가질 않는다. 약간 거센 눈매 주위에 주름이 곱게 진, 흰 머리 숱이 빼곡한데다 콧수염까지 기른, 조금은 키가 작은 노인이 눈가 주름을 찌푸리며 손목시계를 더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똑 딱 손목시계 가는 소리를 몇 번 눈썹을 까딱이며 세던 노인은 잠시 뒤 고개를 들어 찌푸린 눈 그대로 열린 가게 문 밖을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손목시계나 깜깜한 바깥, 둘 중 어느 쪽도 노인에게 명확하게 시간을 가르쳐 주는 쪽은 없는 것 같았다.
노인은 안경을 다시 내려쓰며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게 다 나이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밖과 손목시계 어느 하나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게 무안했던 듯이 시선을 옮겨 서점 안을 휙 둘러보았다. 노인의 반 평생을 몸담았던 직장, 다섯 평 남짓한 서점은 세 벽면과 방 한가운데 곳곳이 천장까지 닿는 갈색 원목 책장들로 빼곡히 차 있었다. 나머지 한쪽 벽면에는 계산대 대신 쓰이는 나무 탁자와 서점에 딸린 작은 방으로 연결되는 작은 문이 있었다. 책장 사이사이의 벽에 걸린 랜턴의 따스한 노란 빛과 원목 책장의 갈색 빛이 잘 어우러져 서점 바깥까지 은은하게 빛이 뻗어나가는 것을 보며, 노인은 가스등이 보급될 때 가스등을 달지 않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되뇌며 싱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잠깐 감상에 빠진 노인의 생각이 문 밖을 바라보며 문득 한 데에 스친다. 비가 갑자기 내리기 시작한 탓에 가게 입구에 가리개를 치는 걸 깜박했던 것이다.
“루이스, 루이스!”
노인은 고개를 돌려, 책장 때문에 가려서 보이진 않았지만 서점 한 켠의 단칸방 쪽으로 한 사람을 소리쳐 불렀다.
“나와서 가게 입구 앞에 가림막 좀 치거라. 비 다 들어오겠다!”
아무런 대답도 없이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찰칵, 탕 하고 문을 신경질적으로 열고 닫는 소리가 난다. 그리고는 마룻바닥 위로 저벅저벅 걷는 소리가 나더니 회색 후드를 뒤집어쓴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노인을 뒤돌아보지도 않고 가게 입구 밖으로 홱 나가버렸다. 잠시 후, 입구 밖에 비치는 빛에 긴 그림자가 몇 번 일렁거리고 몇 가지 기계장치가 드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저 녀석, 대답도 없고 버릇없이… 키만 컸으면 내가 했지..”
노인은 일렁이는 그림자를 슬쩍슬쩍 바라보며 자신이 저 녀석 정도의 키였다면 자기가 직접 했으리라고 툴툴대 본다.
2분여도 지나지 않아서 청년은 후드가 비에 쫄딱 젖은 채 돌아왔다. 청년은 들어올 때도 여전히 노인과는 눈도 맞추려 하지 않았지만, 노인은 청년의 입매가 화난 듯 굳게 다물어져 있다는 것을 쉽사리 눈치챘다.
저 녀석이 돌아왔던 날도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었지. 노인은 가게 안으로 다시 들어서는, 루이스라는 이름의 청년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목적지도 알리지 않고 한 달 여간의 여행을 떠나고 돌아왔던 녀석의 모습. 억지로 이를 꽉 악문 듯 입을 굳게 닫고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후드를 푹 눌러쓰고는 ‘다녀왔습니다’ 한 마디를 남기고 방에 들어가 침대에 쓰러져 자던 그 모습과 지금 가게에 들어서는 루이스의 모습을 노인은 겹쳐 본다. 그게 벌써 2년도 넘게 전인데, 비가 오는 날마다 저러고 있으니… 사춘기가 다시 왔나? 노인은 보이지 않게 속으로 혀를 끌끌 찬다. 노인은 혀를 차면서도 방으로 냅다 향하는 루이스의 등 뒤로 잊지 않고,
“방에는 젖은 옷으로 들어가지 말아라.”
한 마디를 툭 던져 준다. 그 말 한 마디에 아까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던 루이스의 어깨가 순간 움찔한다. 마룻바닥을 저벅저벅 걷는 걸음 소리가 더 들리지 않고, 루이스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서 있는 듯하더니, 잠시 뒤 노인의 시야가 닿지 않는 서점 한 켠 구석에서 콰당탕 소리가 난다.
책장을 들여다보며 오후 나절을 함께 보낼 책을 고르던 노인은 갑자기 난 큰 소리에 혹시나 책장 하나가 무너진 것은 아닌가 화들짝 놀란다. 20년을 함께한 책장인데 갑자기 무너질 리가 있나, 아니 20년이면 무너질 만도 하지, 소리 난 곳으로 황급히 향하던 노인의 머릿속에 순간 두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책장 한 쪽 구석을 돌아 소리의 진원지에 도착한 노인이 본 것은 어이없게도 후드를 눈 위까지 가려 쓴 채 다리를 쭉 뻗어 털퍼덕 앉아 있는 루이스의 모습이었다. 아까의 소리는 루이스가 책장에 몸을 던지듯이 기대며 난 소리인 듯 했다. 앉을 거면 좀 조심히 앉지, 이래서 젊은 놈들이란. 노인은 언짢은 표정으로 다시 돌아서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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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이윽고 아까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마룻바닥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두어 번 내고 서점 구석에서 사라져 버렸다. 몸을 던지듯이 걸터앉은 청년은 노인이 오건 가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아까 그대로 입을 굳게 다문 표정이었다. 제법 다부진 어깨에, 이목구비가 또렷하게, 다소 강하면서도 지적인 인상의 훤칠한 청년은 언뜻 보기에 잠든 듯, 서점 한편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머리 뒤에 깍지를 끼고 눈을 감은 채, 그는 멍하니 주위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책 부스럭거리는 소리, 발자국이 멀어지는 소리, 흔들의자 삐걱거리는 소리. 노인은 아무래도 읽을 책을 몇 권 뽑아 들고 계산대에서 읽기로 작정한 모양이라고, 루이스는 생각했다. 하긴 이렇게 궂은 날에는 손님도 몇 오지 않을 터였다. 마치 눈앞에 선하게 그려지는 듯이 익숙한 풍경들을 떠올려 보다가 루이스는 일순 인상을 확 찡그렸다.
‘아무렴, 이런 게 나랑 무슨 상관이람.’
인상을 한껏 찌푸린 채로, 루이스는 후드 사이로 들어오는 랜턴 불빛을 쫓아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세차게 흔들었다. 떨쳐 내고 싶은 기억의 파편들이, 언제나 비 오는 날마다 그랬듯, 다시 그의 머릿속으로 슬금슬금 파고들고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또다시 또렷이 떠오르는 기억들에 맞서 그는 눈을 감고 무거운 한숨을 후우 하고 쉬었다.
“토니 리켓입니다. 사안이 긴박하니 말은 짧게 줄이도록 하죠.”
“나는, 앤지 헌트라고 해요. 당신의 이름은?”
“이름? 음. 그냥 터커라고 부르게.”
“루이스, 루이스라고? 반가워. 나는 브랜다.”
아지랑이 같은 기억들이, 또 환상처럼 차례로 루이스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연합에 처음 찾아갔을 때의 기억. 토니 리켓 씨, 그는 처음 본 나를 왜 믿고 그런 일을 맡겼을까. 플랜 디코이.. 오롯이 그녀를 위한 작전. 은발의, 젊음의 활기를 얼굴에 머금은, 나이에 비해 다소 성숙해 보이는 인상의 여인. 앤지 헌트. 그래, 그녀를 만나면서 모든 게 변하기 시작했지. 터커 아저씨… 언제나 흰 이를 드러내며 웃어주셨었는데. 미안해요. 내가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조금만 더 일찍 강해졌더라면. 그리고, 그리고… 그녀. 대체 왜? 동그란 얼굴에 안경을 낀, 언제나 내게 웃어주던 그녀. 이해 받았다고,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한 순간, 잡고 있던 내 손을 뿌리치던 그녀. 대체 왜…?
생각의 파도가 브랜다, 그녀에게 이르자 루이스는 머리를 감싸쥐었다. 26년을 살아오며, 나름대로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지만, 그 기억만큼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었고, 넘어가지도 않았다. 그렇게 기억 속 한 달 동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지나고, 몇 번의 죽을 고비를 거쳐서,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은 종착지에서 그가 다시 일어났을 때, 그는 스스로 의미 모를 ‘영웅’이 되어있었다.
앤지 헌트, 그녀에게 잠시 떠나 있겠다고 말했다.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감당하기엔 짐이 너무 무거웠다. 아지랑이 같은, 만남과 이별, 죽음과 삶은, 살아온 날들의 무게에 관계없이 이루어지는 하루아침의 일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 싶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스의 곁에서 떠나지 않는 기억들은 언제나 그 한 달 동안의 일들이었다.
불빛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아까보다 영 기운이 없어 보이는 루이스의 머리 위에서 산들산들 흔들렸다. 보나마나 랜턴 기름이 이제 반쯤밖에 남지 않아서 그런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루이스는 억지로나마 랜턴에 신경을 빼앗기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의 기억은 다시 예전의 한 순간을 더듬고 있었다.
“왜 싸우느냐고? 그렇게 바보 같은 걸 왜 물어?”
“그냥, 왜 싸워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싸우지 않으면 소중한 게 손에서 하나씩 달아나잖아? 손에 든 명품 백을 잃고 싶지 않아서 싸운다던가.”
“당신은 그런 이유 때문에 싸우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요.”
“웃기는 녀석이네. 방금은 자기가 왜 싸우는지도 모르겠다고 했으면서.”
루이스를 안고 밤하늘을 날아가는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은 티격태격하며 루이스와 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지친 듯 진지해 보이는 루이스와 달리 여인은 어린애를 놀리는듯한 말투였다. 여인은 침울해진 루이스를 한 차례 바라보고는 조금 차갑게 쿡쿡 웃으며 말했다.
“거기 너. 이름이 뭐야?”
“…저요? 루이스.. 라고 합니다.”
“성은?”
“모릅니다.”
“그래? 돌아갈 곳은 있어?”
“네. 집은.. 있습니다.”
“가족들은?“
“…없습니다.”
붉은 옷의 여인은 그제서야 비로소 이해했다는 듯이, 아까와는 다르게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 말이야, 마음에 들었어.”
“네….?”
루이스는 여인의 태도와는 정 반대로, 몹시 당황하며 얼굴을 확 붉혔다. 지금의 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니, 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 의외로 대화가 전개될 수 있는지 이해되질 않았다. 루이스가 상황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여인이 다시 한번 말을 꺼냈다.
“왜 싸우냐고 물었지?”
여인의 목소리에는 아까와 달리 장난기는 깃들어 있지 않았다. 루이스가 말투의 변화에 놀라 바라본 그녀의 얼굴은 달빛으로 가득 차, 밤하늘 속에서 은백색으로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지상의 어느 곳도 쳐다보지 않고 정면만을 응시하는 차가운 시선,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루이스는 순간 표정이 탁 풀렸다. 그녀는 그런 루이스를 무시하듯 말을 이었다.
“…적어도 싸우고 있는 동안은, 뭐든 간에 이유 같은 건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아닐까?”
여인은 잠깐 한숨을 쉬는가 하더니, 다시 웃으며 아까처럼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뭐든 간에, 지킬 게 한 가지씩은 있는 게 좋은 것 같아. 가족? 친구? 애인? 뭐라도 좋으니까.”
루이스는 그녀의 말의 의미를 금방 깨달았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지키고 싶은 게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모든 걸 꿰뚫어보고 말하고 있었던 걸까? 루이스는 약간은 벙 찐 표정으로, 하지만 사뭇 진지하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기, 그런데.. 당신 이름은…?”
질문과 동시에 여인이 루이스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루이스가 자기가 뭘 잘못 물었나, 생각하던 바로 그 순간, 여인이 갑자기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이제껏 들어보지 못하게 크게, 밤하늘에 여인의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루이스는 그제서야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고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통성명을, 이제서야 하다니. 보통은 만나자마자 하는 게 통성명 아니었던가…?
여인은 한참을 웃다가, 루이스의 얼굴을 힐끗 바라보며 지나가듯 한 마디를 툭 던졌다.
“트리비아 카리나. 그냥 트리비아라고 불러.”
…
…
…
…
루이스의 귓전에, 다시 랜턴 타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기름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언제나, 마지막에 떠오르는 기억은 그녀와의 대화였다. 루이스는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들에 휩싸여 그녀와의 대화를 떠올리곤 했다. 스스로 가장 쓸데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루이스는 늘 생각했다. 싸움의 이유, 그런 게 중요했던가? 어차피 이기고 지는 것으로 모든 게 갈리는 게 싸움이라면, 그저 이기면 될 뿐일 텐데. 그런데 왜? 무엇이 기억을 그렇게 혼란스럽게 하는지? 트리비아 카리나? 그녀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그녀의 존재도 혼란스러웠지만 더 혼란스러운 것은 그녀가 남긴 말들이었다. 지켜야 할 것? 가족? 친구들? 애인? 그의 옛 애인은,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가 없는 곳에 언제나 서 있었다. 친구들은 – 없었다. 그에게 친구들이란, 언제나 조금 먼 거리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는, 감시자처럼 느껴졌다. 루이스의 머릿속에 순간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사람들과 가까이 하기 힘든 것은 가족이 없기 때문이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루이스는 고개를 떨구었다. 후드를 쓴 뒤통수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에게 가족이란,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것, 기대고 싶을 때 기댈 수 없는 것, 그리고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다시는 가질 수 없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에게는 잃어버린 그 모든 것들. 루이스는 그 모든 것들을 떠올리면서,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상념들을 지워 버리려고도 하는 듯이, 뒤통수를 감싸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어차피 의미 없을 것을…!’
루이스는 머리를 감싸쥔 채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고작 이런 걸 가지고…!’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루이스는 이를 꽉 악물었다.
‘그래, 다 잊자. 부질없는 것… 가족, 가족 따위, 나는 아무것도 지키지 않아도 돼!.”
루이스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에 계속 되풀이되는 건 단지 자기가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가족이란 있으면 좋고, 없다면 그뿐일 것이었다. 지금까지도 가족 없이 잘 살아온 그였다. 가족, 그런 걸 떠올리며 울적해지는 건 어린아이 같은 짓이라 생각했다. 지킬 것은 그 때 연합에서처럼, 무엇이든 마음먹은 것을 지키면 될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두근거리던 심장도, 소용돌이치며 요동치던 머릿속의 상념들도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았다. 비 오는 날 씻기지 않는 울적함 같은 기분은 영 나아지질 않았지만 루이스는 그건 단지 날씨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덮어 버렸다. 다시는, 이 문제 때문에 골치를 썩이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2년 동안 이렇게 고민했는데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답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문제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그는 생각들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렇게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루이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려던 찰나,
“저… 저기. 오빠!!!!!!!!"
갑자기 누군가가 루이스 바로 앞에서 비명을 지르듯 그를 소리쳐 불렀다!
“으악?!!!”
“꺅!!!”
루이스는 갑자기 난 소리에 놀라서 책장에 뒤통수를 쾅 박으며 큰 소리를 질렀다. 루이스의 비명 소리에 그를 불렀던 사람도 덩달아 놀라서 뒤로 한걸음 물러나며 비명을 빽 질렀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앞을 바라보는 루이스의 세 걸음쯤 앞에는, 남빛 머리를 곱게 양쪽으로 묶은, 동그란 얼굴에 통통한 볼을 가진 키 작은 소녀가 노란 레인코트를 입은 채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죄.. 죄송해요…! 그.. 그런데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아, 아니야. 그런데 넌…”
“정말, 정말 죄송해요…! 사, 사실 아까 아저씨라고 불렀는데 대답이 없어서 그.. 그게..”
“아, 아니 그러니까..”
“아녜요! 전 정말 처음에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오빠라고 부른 건 저기 그러니까…!”
소녀는 루이스가 영문도 모를 사이에 엉뚱하게도 루이스를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은 것에 대해 사과하고 있었다. 게다가 느닷없이 폭주하는 소녀의 말들 중 일부가 루이스의 심기를 묘하게 건드렸다. 루이스는 순간 벌떡 일어나며 소녀에게,
“아니 잠깐, 잠깐!”
하고 외쳤다.
막상 소녀의 말을 끊고 나자 루이스도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그렇게 잠깐의 정적. 루이스가 조심은 어색해진 분위기에서 다시 말을 꺼냈다.
“네가 보기에 내가 몇 살로 보이는데?”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가던 소녀는 루이스의 키를 잠시 위아래로 훑어보고 루이스의 얼굴을 보며 잠시 곰곰이 생각하는 듯 뜸을 들이더니, 루이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음… 스물 한 살?”
루이스는 아이의 대답을 듣고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21살이면 아저씨였던가? 아저씨 나이는 아니지 않나? 하지만 난 26살인데…?’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소녀가 던진 호칭 문제. 호칭은 이 순간만큼은, 루이스와 소녀 사이의 거리를 나타내는 지표였다. 루이스는 순간 아까까지 하던 생각들, 과거의 상념이나 자기 눈 앞에 있는 소녀에 대한 궁금증을 다 잊어버리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답은 의외로 금방 나왔다. 단 3초만에, 루이스는 결론에 다다랐다. 아저씨라는 호칭보단 오빠라는 호칭이 아무래도 좋았다. 그리고 루이스가 암만 생각해도 자기는 아저씨라고 불릴 만한 나이는 아니었다.
막상 결론에 도달하고 나자, 루이스는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문제에 대해 순간 고민했었는지 깨닫고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뭔가 소녀의 페이스에 말려들어도 단단히 말려들었던 것이다. 루이스는 이 날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소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녀는 여전히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루이스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냥 오빠라고 불러.”
루이스는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아이의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의 볼은 곧 울 것 같은 아이의 볼처럼 발그스레하고 따끈따끈했다. 루이스의 웃음을 본 소녀의 표정도 곧 꽃이 피어나듯 환하게 밝아졌다. 소녀는 아까 언제 울 것 같았냐는 듯이 밝고 명랑하게 대답했다.
“네!”
거짓말 없는, 진솔하고 편안한 대화. 계산도 속임수도 없는 잠깐의 대화로 루이스의 속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대화의 내용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최소한 저 소녀가 자신을 아저씨라고 부르지만 않는다면야, 호칭 같은 것도 아무려면 다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부르려면 올바른 호칭은 ‘오빠’ 정도 밖에 없다고도 생각했지만 말이다.)
루이스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소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긴 어떻게 왔어?”
“아 저… 책… 책을 보러 왔어요.”
소녀는 아까보다 표정은 밝았지만 왜인지 말을 다시 어물거리며 뒤를 살짝 뒤돌아보았다. 루이스도 소녀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았다. 소녀의 시선이 머문 서점의 한 편의 벽 쪽, 계산대가 있는 책상에선 노인이 책을 앞에 펼쳐 놓고 빗소리를 자장가삼아 자고 있었다.
루이스는 한 손으로 얼굴을 살짝 가리고 한숨을 푹 쉬었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면서도 루이스는 애써 웃으면서 소녀에게 말했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소녀는 짧게 “네.” 하고 대답하고는 책상 쪽으로 걸어가는 루이스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루이스는 노인을 몇 번 흔들어 깨우는 듯하더니 곧 흐느적거리는 노인을 업고 일어났다. 루이스는 힘들어하는 기색도 없이 노인을 업고 서점 한 쪽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소녀가 말똥말똥한 눈으로 서점을 한 바퀴 다 둘러보았을 무렵, 루이스가 방문을 다시 열고 나왔다.
소녀는 방문을 열고 나오는 루이스의 얼굴을 보자 미소를 짓는듯하더니 이내 곧 크게 재채기를 했다. 루이스는 그제서야 소녀의 레인코트가 비에 젖어 흥건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 코트 이리 줘.”
"네? 아 아뇨….! 괜찮은데…”
루이스는 몸을 숙여 소녀의 코트를 손수 벗겨 주었다. 루이스의 손길이 닿는 내내 소녀는 살짝 떨며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단순히 추워서일 거라고, 루이스는 생각하며 소녀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런데, 여긴 혼자서 온 거야?”
“네..”
“그래? 어쩌다가?"
소녀는 갑자기 말을 뚝 그치고 시무룩해지더니 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곧 분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크게 루이스에게 소리쳤다.
“어… 언니랑 싸웠어요!”
코트를 들고 일어나던 루이스는 난데없는 소녀의 기세에 순간 움찔했다.
“어… 언니가…”
소녀는 소리치듯 외치고 나서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울 듯한 표정이 되었다. 물론 루이스도 이렇게 비 오는 날에 소녀가 아무런 사정도 없이 찾아왔으리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생각 없이 던진 질문에 이렇게 격한 반응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루이스는 소녀에게 상처가 될 만한 질문을 더는 묻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소녀를 다독여 주었다.
“괜찮아. 말 안 해도 돼.”
소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루이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루이스는 그런 소녀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웃어
주었다.
"책을 보러 왔다고 했지?”
소녀는 대답 대신 루이스의 얼굴만 바라보며 고개만 두어 번 끄덕였다.
“그럼 잠깐만 기다려.”
루이스는 아까 노인을 업고 들어갔던 방에 소녀의 노란 레인코트를 들고 들어갔다. 잠시 후 문을 열고 나온 루이스의 손에는 레인코트 대신 ‘얼음성’ 이라는 제목의 책이 한 권 들려져 있었다.
뒤돌아 방문을 닫고 소녀에게 향하던 루이스가, 불현듯이 무언가가 생각난 듯이 소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참,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은 뭐니?”
소녀는 잠시, 아주 잠시, 망설이고는 대답했다.
"샬럿. 샬럿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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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능력자들의 평범한 일상을 주제로 글 쓰기를 좋아하는 일반인 세크레트입니다.
장장 1개월도 넘는 프로젝트 1부가 이제서야 끝이 났네요. ㅠㅠ
작가의 말에 쓰고 싶은 말들이 산더미 같지만, 지금 나가봐야 하는 관계로 조금 이따 마저 쓰기로 하겠습니다. ^^
글 뒷 부분에 중요한 부분과 복선이 몇 개 있는데 마무리를 영 급하게 한 게 아쉽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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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잉여로운 글에 비해 그림이 너무나도 보배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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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지 않으신 분들이라도 그림을 봐주시고 댓글 + 추천을... ㅠㅠ
잉여로운 글쟁이에게 보배로운 삽화를 하사해주신 그림작가 유기농귤 님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ㅎㅎ
천사같은 그림작가님의 블로그 주소 :
http://blog.naver.com/2_2_0a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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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메인이라니...!
내가 이 텍스트 편집기를 다시 붙잡게 될 줄이야
주말 이틀 동안 워낙 뛰어난 게시글들이 많이 올라와서 묻힐 줄 알았는데 난생 처음 메인에 왔네요!
방금 보고 너무 놀랐어요 ㅠ_ㅠㅋ
비록 유기농귤 님의 동화 같은 그림으로 어느 정도 만회한 감은 있지만,
만화나 기타 그림 매체에 비해 가독성이 떨어지는 팬픽션이 메인에 올라오다니, 감격스럽습니다. ㅠㅠ
(며칠 전에 진정한 능력자 Ista 님의 글도 메인에 올라왔다는 사실에 다소 부끄럽지만요. ㅎㅎ)
베스트에 올라오기에는 기타 그림쟁이 능력자들이나 글쟁이 능력자들에 비해 많이 부족하지만 ㅠ_ㅠ
과분한 관심 받은 만큼 다음 작품은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사실 1편 쓰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그냥 살짝 2편은 쓰지 말까... 생각하던 차에,
베스트까지 왔으니 빼도박도 못하게 완결까지 내야 하겠네요 ㅎㅎ
(덕에 유기농귤님은 두 배로 피곤하실 것 같네요... ㅎㅎ 귤님께는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_+)
덧붙이자면, 본 작품은 이제 거의 사이퍼즈 정사(正史)로 취급받는 Ista님의 소설,
영웅전설 - 눈의 여왕, 겨울의 보석
을 모티브로 하고, 줄거리를 참조하였습니다.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945160
<SPAN style="FONT-FAMILY: Dotum,돋움"><SPAN style="FONT-SIZE: 9pt"><SPAN style="FONT-FAMILY: Dotum,돋움"><SPAN style="FONT-SIZE: 9pt">↑ 영웅전설 - 눈의 여왕, 겨울의 보석 읽으러 가기
이번 소설은 Ista 님의 문체도 참조로 하고, 글 쓰는 사람 입장으로서 여러 모로 Ista님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Ista님의 팬임을 밝히는 바입니다
Ista님이 정사의 이야기를 웅장하고 흥미로우면서 묵직한 문체로 그려내신다면
저는 능력자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사담, 사소로워 보일 수 있는 일들을 써 내고 싶네요.
비록 글이 그림에 비해 가독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스토리의 빈자리를 채우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어쩌면 팬픽션만의 즐거움은 아닐지요? ㅎㅎ
팬픽션을 쓰는 분들이 모두 Ista님의 이 글을 읽어보셨으면 좋겠네요. ^^
(개인적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글이었습니다.)
http://cyphers.nexon.com/cyphers/article/art/topics/1727406
그림을 그려주신 유기농귤님과 관심 주신 여러분들께 모두 감사드립니다. ^^
댓글은 수시로 확인하고 있으니 되는 한 많이! 부탁드려요. ㅎㅎ
그럼 다음 작품으로 찾아뵙겠습니다. ^^
천사같은 그림작가님의 블로그 주소 :
http://blog.naver.com/2_2_0a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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