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글 아저씨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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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8 05:42:53
이미지 크기 줄이는 법을 모르겠네요 ㅠㅠ
제목 그대로 엘리가 이글에게 쓴 편지입니다
함께 들으셔도 좋고 안 들으셔도 좋을 노래
안녕하세요, 아저씨.
그곳은 날이 좋은가요? 오늘도 여기, 런던의 거리는 안개로 가득하고 하늘은 뿌옇기만 해요.
음. 아저씨. 지금 아저씨라고 했다고 툴툴대고 있는 거 다 알아요. 하지 마세요. 아무리 그래도 이제 와서 제가 아저씨를 오빠라고 부르겠어요? 아저씨는 그냥 아저씬걸. 혹시 아직까지 투덜대고 있다면 다이무스 아저씨에게 전부 이를 거예요.
아저씨, 지금 놀랐죠?
제가 그동안 다이무스 아저씨랑 얼마나 친해졌는데요. 이제 저 막 놀리다가는 아저씨 큰일 난다니까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구요? 저는 다 알고 있어요. 마틴 오빠 수제자라니까요, 제가! 어때요. 무섭죠?
참, 선물은 항상 감사히 받고 있어요. 무슨 선물인지 궁금하시죠? 당연히 궁금하시겠죠. 저는 정숙한 레이디니까, 특별히 마음을 써 알려드릴게요. 매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가 끝나가는 밤에는 어여쁜 장미꽃이 제 나이만큼 수를 늘리며 도착하고 있어요. 작년에도 어김없이 스물한송이의 장미와 수많은 안개꽃들이 홀든이라는 이름만 적힌 카드를 품은 채 오지 않았겠어요? 제 생각엔 이런 이벤트를 아저씨가 직접 준비했을 리는 없으니, 분명 부탁받았을 게 분명한 다이무스 아저씨가 한 일이겠지만요. 그래도 저는 착하니까, 아저씨에게도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아요!
아! 그리고 다이무스 아저씨는 이제 은퇴를 하시고 글을 쓰세요. 모르고 계셨죠? 거봐요, 저는 다 알고 있다니까요! 여기서 놀라시면 안될텐데. 더 놀라운 사실을 알려드릴 거란 말이에요. 그게 뭐냐면요. 글쎄 저번엔 제게 부탁 하나를 하시지 않겠어요. 세상에, 맙소사. 그 대단한 회사의 영웅이자 아저씨의 큰형인 다이무스 홀든이 말이에요. 아저씨도 놀랍죠? 근데 별 건 아니었어요. 자기가 쓴 책을 세 권만 뽑고 싶은데 가능한 곳을 알고 있냐는 물음이었죠. 참나, 세 권이 뭐람. 하지만 제가 누구겠어요? 아저씨의 앙큼한 꼬맹이, 엘리노어 러브 캠벨 아니겠어요? 나흘 후쯤엔 전국의 서점에서 그 책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출판사에 미리 부탁을 해 두었거든요. 아저씨가 예전에 제게 했던 말 기억나세요? 다이무스 아저씨가 장남이 아니었다면 대단한 작가가 되었을 거라는 말. 작가 선배인 제가 장담하건대 아저씨의 큰형님은 나흘 후부턴 유명한 작가로 이름을 떨치실 거예요. 제가 살짝 읽어봤는데, 정말 멋졌다구요. 내용이 무어냐고요? 아저씨와 벨져 아저씨의 흑역사요. 거짓말 같죠? 궁금하시면 나흘 뒤를 기대 하시라!
음, 서두가 무척 길어졌네요.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가봐요.
사실은요. 아저씨.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건 간밤에 있던 일 때문이에요. 지난 밤, 저는 꿈을 꾸었어요. 아주, 아주 그리운 꿈이요.
잉게 언니와 토마스 오빠가 아침부터 분주히 샌드위치를 만들고, 아저씨와 레베카 언니가 저와 피터 오빠에게 빳빳이 풀을 먹인 새 옷을 입히고, 휴톤 아저씨가 과일을, 도일 아저씨가 음료를, 루이스 오빠와 트리비아 언니는 우리가 가지고 놀 장난감을 챙겨 레이튼 아저씨가 준비한 차를 타고 놀러 나간 그 눈부셨던 날을 말이에요. 그날은 햇볕이 너무도 따사롭고, 하늘엔 구름도 한 점 없어 무뚝뚝한 피터 오빠도 어딘가 상기된 얼굴이었죠.
우리가 도착한 곳은 노오란 민들레가 화사한 얼굴을 내밀고 있던 꽃밭이었어요. 그곳에서 아저씨들과 레베카 언니는 어디서 가져온 건지 커다란 유리잔을 들고 노래를 불렀고, 트리비아 언니는 책을 읽고, 루이스 오빠는 피터오빠와 팔씨름을 하고, 토마스 오빠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누워있고, 잉게 언니는 저에게 천사의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아가, 이 새하얀 꽃은 솜이 아니라 민들레의 씨앗이란다. 이 씨앗에 소망을 담아 숨을 불어 넣으면 그 마음을 담아 씨앗이 멀리 멀리 날아오른단다. 그리하면 하늘나라 천사님이 씨앗에 담긴 마음을 거두어 가시지.
언니의 목소리를 달콤하고 또 아늑해서, 저는 재앙이란 단어가 햇볕처럼 다정하고 언니의 불처럼 따스하구나, 생각했어요. 그리고 문득, 이 모든 것이 너무도 좋아서, 그래서 조금은 무서워서 멀뚱히 언니 손에 쥐어진 꽃만 보고 있었죠. 그러자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던 아저씨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곤 꼬맹이, 잘 봐! 하더니 훅, 하고 하얀 꽃씨들을 날려 보냈어요.
그 모습에 놀라 저는 울음을 터뜨리고 레베카 언니와 다른 아저씨들이 몰려와 아저씨의 하얀 머리위로 그 커다란 유리잔을 쿵쿵 찧어대고, 누워있던 토마스 오빠가 그 모습을 보고 자지러지게 웃어댔고, 루이스 오빠와 트리비아 언니가 또 다른 꽃씨를 가져와 피터오빠와 제 손에 하나씩 쥐어주었죠. 그리고 마침내 피터 오빠가 먼저 꽃씨를 날려 보내자 씨앗들이 새하얀 소망을 품고 멀리 멀리 날아올랐고,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가슴이 벅차고 마음이 뭉클해서, 하지만 그 감정이 무언지 몰라서 눈물만 훌쩍였어요. 결국 잉게 언니가 저를 꼬옥 안아주고 나서야 용기가 나, 저는 엄마가 친구들과 함께 사라졌던 밤 이후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소원을 간절히, 또 간절히 빌어 한껏 숨을 불었죠. 그러자 꽃씨들이 나풀나풀 하늘로 날아올랐고 잉게 언니가 웃음을 터뜨렸고, 루이스오빠와 트리비아 언니가 박수를 쳤고, 토마스 오빠는 피터 오빠를 붙들고 춤을 추었고, 레베카 언니와 아저씨들은 다시 노래를 불렀어요. 그리고 아저씨가 저를 안아들고 외쳤죠.
잘 했어! 역시 우리 꼬맹이야!
그런데 아저씨, 있잖아요.
저는 그게 너무 억울해요. 그날 언니가 말해주었던 천사의 이야기와 흥겨운 노랫소리와 즐거운 웃음과 아저씨의 너른 품과 따스했던 햇볕보다도, 그날의 붉게 물든 오빠와 언니들과 아저씨들의 모습이 훨씬 선명해요. 그래서 저는 꿈을 꾸고 나서야 기억되는 과거의 행복보다 돌이킬 수 없는 그날의 죽음만이 진득한 그림자를 남기며 제게 붙어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그날은 여느 때처럼 다녀오겠노라 웃으며 말했던 아저씨들과 레베카 언니와 토마스 오빠가 돌아오지 않은 날이었어요. 밖에서는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잉게 언니는 피터오빠와 저를 대신해 불타올랐고, 우리는 아저씨가 밀어 넣은 공간에 갇힌 채로 아저씨의 하얀 머리카락이, 너른 등이, 그 환한 웃음이 붉게 물드는 모습을 보고 말았죠. 간신히 우리를 찾은 트리비아 언니는 미쉘 언니에게 우리를 맡긴 채 사라진 루이스 오빠를 찾아 액자를 건넜고, 미쉘 언니는 우리를 다시 재단에 맡기고 전쟁에 나섰고, 그리고, 그리고…….
아저씨. 믿기지 않겠지만 이제 피터 오빠는 더 이상 미쉘 언니를 찾지 않아요.
아저씨. 그날로부터 벌써 십 년하고도 여섯 해가 지났어요. 전쟁은 끝이 났고, 수많은 능력자들이 죽었어요. 어느새 피터 오빠는 아저씨보다 고작 한 살이 모자라고, 저는 토마스 오빠와 동갑이 되어버렸죠. 맙소사. 믿겨지세요? 우리가 이만큼이나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이요. 지금의 피터 오빠가 아저씨보다 더 크다니까요? 화내지 마세요. 다이무스 아저씨도 그렇다고 하셨단 말이에요.
그런데요, 아저씨.
아직도 세계는 삭막하고 황폐해요. 3차 능력자 전쟁은 끝이 났지만, 진짜 전쟁은 무엇도 끝나지 않은 것 같아요. 거리는 여전히 피폐하고, 세계 어딘 가에선 여전히 사람들이 죽어나가며, 이제 정말 몇 되지 않는 능력자들은 핍박을 피해 사회의 한 구석에서 숨죽이고 살아가고 있죠. 너무 허무하지 않나요. 우리 모두가 그토록 바라던 종전의 뒤에 숨어 있던 것이 이런 현실이라는 게.
사실은 알고 있어요.
우리가 감내해야 했던, 그리고 모두가 박수갈채를 보냈던, 그 추악하고 끔찍한 고통들은 이내 잊힐 것이라는 걸.
그로 인해 제게는 머지않아 마르지 않는 슬픔과 감당할 수 없는 그리움이 또 다시 찾아오겠죠. 저는 또 눈물을 쏟아내고, 언니들과 아저씨들의 이름을 외치고, 외치다 목이 메어 가슴을 쥐어뜯다 결국 별 수 없이 설움을 삼켜내겠죠.
하지만 다른 것들도 알고 있어요. 제가 울고 있으면 피터 오빠가 묵묵히 다가와 제 손을 잡아 줄 것이고, 올 겨울에도 집 앞에 어여쁜 꽃이 도착할 것이고, 저는 또 웃을 것이고,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우리 모두가 만날 날이 올 것이라는 걸요.
그리하여 저는 오늘에서야 간신히 쓴 이 편지를 가방에 넣어, 샌드위치를 싸들고 우리가 그날 앉았던 민들레 꽃밭에 앉아, 소담히 핀 씨앗을 조심히 꺾어 하늘로 날려 보낼 것이에요. 그러면, 천사님이 그 씨앗에 담긴 제 마음을 거두어 그리운 잉게 언니와 상냥한 토마스 오빠와 다정다감한 도일 아저씨, 휴톤 아저씨와 자상한 레이튼 아저씨와 유쾌한 레베카 언니. 그리고 보고 싶은 아저씨가 계신 곳으로 전해주실 테죠.
내일은 날씨가 맑겠죠? 얼굴도 보여주지 않으면서 그 정도는 해주세요. 해주시리라 믿어요!
사랑해요. 그리고 보고 싶어요.
아저씨의 영원한 꼬마, 엘리가 애정을 담아.
꼬마의 영원한 왕자님, 이글 홀든에게.
추신.
트리비아 언니는 루이스 오빠를 만났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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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연합 꼬맹이들만 살아남는다면 어떨까 싶어서 쓴 글입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홀든 삼형제 중에서 다이무스만 살아남았다는 설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