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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3 21:04:48
멜빈 리히터의 라보는 과학자들에게는 꿈의 공간이다. 무엇이든 배울수있고
무엇이든 만들수있다. 그러나 그의 라보에 찾아오는 사람은 드물다. 그의 속
도와 사고에 맞출수있는사람이 드물기때문이다.
멜빈 본인은 타인과 상황을 이해하는것에 최적화되어있지만 자기 자신을 타
인에게 이해시키고 자기 자신을 타인에 맞추어 변화시켜야한다는 마음이 없다.
인간의 수만큼 인간의 사고는 존재하며 그 모든 사고에 대응하기란 불가능하다.
많은 이들이 천재 소년의 명성에 라보의 문을 두드렸지만 그들 모두 곧 라보를
떠났다.
그들이 원한것은 명성의 근간이 되는것들의 파편이었을 뿐이었고 멜빈 에게있어
보잘것없는 조각을 보물인양 품에 감추고서는 라보를 떠났다. 멜빈은 소모가 반복
되자 자신의 수족이 될 사고가 가능한 로봇들을 만들었고 라보의 문은 열리지 않게
되었다.
소모가 없는 하루는 길다. 그 긴 하루에 대해서 멜빈은 불평해본적이 없다. 시간의
양 끝을 잡아 길게 늘여놓았을뿐. 소모가 일어나는것보다는 나았다. 효율을 신봉하
지는 않는다. 그러나 비효율을 용납할 이유 또한 없다.
멜빈은 연구소 한켠에 먼지가 쌓여간다고 생각했다. 라보의 문을 두들기는 사람은
없어졌다. 멜빈은 실험 결과가 나오기 전의 짜투리 시간동안 그의 조수들에게 이름
을 붙였고 말을 가르쳤고 개성을 부여했다. 그가 좋아하는 노래를 가르쳤고 그의
마음을 헤아리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날 그시간에 라보의 문을 누군가 두드렸을
때도 조수들과 시간을 때우고있을때였다. 멜빈은 호기심이 생겼다. 그런식으로 방
문하는 멍텅구리들이 언제쯤 끊겼는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실험중이라면 당연히 무
시했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남는다.
멜빈은 잠깐 기다려보았다. 그가 나에게 절실히 바라는것이 있다면 몇번 더 두드
릴 것이다. 실험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세네시간이 더 걸린다. 멜빈은 소파에 몸을
눕히고 그의 조수에게 '문이 텀을두고 세번까지 두들겨지면 문을 열어주고 나에게
안내하라'고 말했다. 세번까지는 두드리지 않겠지. 멜빈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멜빈. 손님입니다."
한참 기분좋게 골아떨어져있을때 조수의 목소리가 들려 눈을 떴다. 멜빈은 깊게 후
회했다. '절대로 열어주지 말라'고 했어야했다. 기분좋은 잠도 뺏기고 마음에도 들
지 않는 손님이라면 그 귀찮음은 감당할수가없다.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 뒤로 누
군가의 발걸음이 다가왔다. 가벼운 발소리. 구두가 아니다. 몸이 가볍다. 걸음에 조
심성은 없다.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소년이 아닐까 생각했다. 멜빈의 연구자로서의
경력은 또래중에 아무도 따라오거나 능가하지 못한다. 만약 한참 연상이더라도 상
관없다. 그런 기본도 없는 괴짜를 어른취급할 이유가없다.
"무슨일로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앉아."
멜빈이 앉은 소파 맞은편에도 소파가 하나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적당한 크기
의 테이블도 있다. 아주 오랫동안 쓰이지 않고 있었지만 멜빈이 있던 그곳은 응접실
이자 티테이블이었으니까.
멜빈의 뚱한 얼굴 앞으로 한 소년이 섰다. 보기 드문 운동화. 저런것을 스니커즈라고
하던가. 유행에 민감하거나 있는집 자식이다. 낮선 발걸음 소리였단 말이지. 얼굴을
보았다.
시원시원한 인상의 금발 소년. 대충 짐작은 맞았다. 그러나 이런 소년이 왜 자신을 찾
는지는 짐작이 가질 않았다. 그렇다면 말을 들어봐야지. 멀뚱히 있는 멜빈을 향해 소
년은 말했다.
"헨리 맥고윈이라고 해. 너를 스카우트하러왔어."
보이스카웃이라도 할 속셈인가. 번지수를 너무 잘못찾은것아닌가. 멜빈의 어이없다는
표정을 보고 헨리 맥고윈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소년은 씁쓸하게 웃었다. 일단 대답은
해야겠군. 멜빈이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난 보이스카웃에는 관심 없는데."
인디언들이라도 몰아낼 셈인가. 저런 서글서글한 표정과 활기찬 목소리로 인디언들을
도살하고 다닌다면 참 가관이겠군. 아니면 버팔로 사냥이라도 나설 셈인가. 말을 타고
버팔로몰이를 하기엔 그 스니커즈는 미스인것같은데.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
나 시선과 표정 그리고 말투에 헨리 맥고윈은 이것저것 많이 느낀것같았다. 그래 느껴
주지 않으면 곤란해.
"우리는 호라이즌이고. 버팔로와 인디언하고는 관계가 없어. 우린 우리 자신
을 지키기 위해 모였어. 사이퍼들을 위해서."
사이퍼... 꽤나 의미심장하게 말을 하는군. 사이퍼란 용어가 저런 소년에게서 나오다
니 사이퍼란 그렇게 흔해져버린것인가? 사이퍼에 대해선 말을 아끼는것이 좋을텐데.
사이퍼에 관해서는 악취나는 얘기들밖에 없으니까. 인체실험을 하지 않으면 데이터를
얻을수없는 악마의 지혜다. 그딴걸 과학자앞에 화제로 들이밀다니. 제정신이 아니군.
그건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금기다. 이렇게 소풍나오듯이 와서는 꺼낼 얘기가 아니다.
"미안해 멜빈. 네가 기본적인 모럴을 가진 과학자라는것을 알아. 하지만 너
에게 닿는 제대로 된 커넥션이 나에게 없고 설명을 주저리 늘어놓는다면 넌
항상 나를 쫒아내버렸거든. 그래서 방침을 바꾸기로했어."
헨리 멕고윈은 이전에도 그를 보았었다는듯 말했다. 기억에 없다. 헨리 멕고윈의 눈에
거짓은 없다. 이것이 연기라면 그는 타고난 배우다. 헨리 멕고윈은 말을 이었다.
"나는 시간 여행이 가능한 능력자야."
멜빈은 약간 두통을 느꼈다. 헨리 멕고윈은 수습이 불가능해진 멜빈의 표정을 흘끗 보
더니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 테이블에 10번쯤은 앉았지. 너의 제피L과 제피R에 대해서도 들었었어.
아돌프 박사님의 꿈에 대해서도."
멜빈은 속이 서늘해졌다. 어느것도 타인에게 발설한적이 없는 이야기이다.
"...내 생각을 읽을수있는건가?"
읽어선 안되는것들이 많았다. 멜빈의 손이 올라갔고 조수들-제피L과 R-은 내장된
초소형미사일들을 장전했다. 그것들은 명백히 헨리의 목숨을 노리고있었다.
"두세번 당하니까 이젠 덤덤해지는군. 처음엔 겁을 먹어버려서말야. 심지어
감금되어버리는마당에 시간을 너무 낭비했어. 할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앤더
스빌에까지 갈뻔했다구."
멜빈은 손을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조수에게 말했다.
"헨리 맥고윈, 사이퍼, 할아버지"
노란 제피의 스크린이 표정이 아닌 다른것으로 바뀌었다. 돋보기같은것이 움직이
다가 사라지고 표정으로 바뀌었다.
"접속자 멜빈 리히터에 대해서만 열람 가능한 암호화된 영상이 1개 서치되었
습니다. 플레이하시겠습니까?"
"열어봐."
"스크린으로 전송하겠습니다."
천장에 매달려있던 모니터 하나가 멜빈 앞으로 내려왔다. 멜빈은 잠시 잊은것을 챙기듯
이 테이블 너머의 공간을 향해 외쳤다.
"라이언, 헨리 멕고윈을 인식했지? 헨리 멕고윈을 붙들고있어. 수상한짓을 하면
바로 처리해."
쿵.쿵..쿵.쿵.. 어둠속에서 등장한건 거대한 사자형상의 기계로봇이었다. 그것은 헨리 맥고
윈의 등뒤에 서서는 큰 입을 벌려 헨리 맥고윈의 머리를 아프지 않을정도로 물었다. 머리
만 삼켜진 헨리 멕고윈의 칭얼대는 목소리가 틈새로 흘러나왔다.
"이런 전개는 아직 못 겪어봤는데..하하..."
그에 맞추어 영상이 켜졌다.
화면에 비추어진것은 멜빈 리히터가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인물이었다. 아돌프 반사우스. 랭커
스터의 째깍임과 트릭시 폭스의 차가운 눈이 멜빈 리히터의 심장 한가운데를 파고들었다. 다
행이다. 헨리 멕고윈의 얼굴 자체를 덮어서 다행이다. 멜빈 리히터는 동요하고있었다.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아돌프 반사우스는 낭비가 없는 사람이다. 헨리 멕고윈은 아돌프 반사우스의 뜻으로 왔다. 그는
시간여행자이다. 호라이즌은 내가 들어가야만하는 장소다. 영상은 흘러간다. 하지만 그 영상
의 내용따위 의미가 없다. 저것은 멜빈 리히터가 헨리 맥고윈에게 협력해야한다는 명령 그
자체다.
영상이 멈추었고 라보는 침묵으로 뒤덮였다. 그 침묵사이로 헨리 맥고윈의 웅얼거림이 비집
고 들어왔다."이제 믿어줄수있겠어?"
멜빈 리히터는 제피들도 라이언도 치웠다. 헨리 멕고윈은 웃었다.
"아돌프 박사는 자신의 도움 없이 너를 설득해보라고 말했어. 내 능력으로 너를 이
해시켜보라고 말이야. 그런데 시간을 돌고돌아 결국 아돌프 박사의 메시지로 믿음을
얻다니, 부처님 손바닥의 손오공이 된것같아. 아 혹시 부처님하고 손오공이 무엇인지
알아?"
멜빈 리히터는 씁쓸하게 웃었다.